부여문화원
글_박진수
충청남도 무형유산
산유화가 : 시대를 넘어선 노래의 여정
충청남도 부여는 금강하구에 위치한 넓은 평 야를 바탕으로 과거 논농사가 주종을 이루었던 지역이기에 이 지역의 노동요는 논농사와 관련 된 노래가 많다. 소개할 충청남도 무형유산 「산 유화가(山有花歌)」 역시 논농사를 지으며 부르 는 노동요이다. 소개에 앞서 「산유화가」가 전승 되고 있는 세도면은 금강이 흐르는 평야지대 로 전통적으로 논농사의 비중이 큰 지역이다. 1990년대 초반 방울토마토의 재배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전국 최대의 방울토마토 산 지가 되었다.
과거에는 모를 심을 때 주로 품앗이를 하였는 데 농사를 많이 짓는 집은 품앗이뿐만 아니라 일꾼을 사서 모내기를 했는데, 이때 능률을 올 리기 위해 소리꾼을 불러 노래를 시키기도 하였 다. 소리꾼이 장구를 치며 소리를 메기면 나머 지 일꾼들이 후렴을 따라 부르면서 모내기를 하 였다. 이처럼 「산유화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 포되어 있는데 첫째는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모 심는소리」를 지칭하는 것이며, 둘째는 지역에서 불렸던 논농사소리를 통칭을 의미한다.
원래 「산유화가」는 백제시대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데 나라를 잃은 슬픔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 을 담은 노래이기 때문에 구슬프고 처량한 느낌 을 준다. 조선 중기 이사질(1705~1776)은 「산 유화가」를 충청지역에서 불리고 있는 농가(農歌)라고 하며 백제왕이 남긴 노래라고 그의 유 집인 『흡재집(翕齋集)』에 기술하고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산유화는 충청지방의 농가(農歌)인데, 세상에 서는 백제왕이 남긴 노래라고 전해진다. 나는 일찍이 부여의 노인들에게 들으니, ‘의자왕대에 산유화와 고유란이란 두 노래가 있었는데 백제 가 망한 후에 산유화는 농가에 남았고 고유한은 일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니, 지금 부여 현 북쪽에 고란사가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 (후략)

이를 통해 백제왕이 남긴 노래가 18세기 중반 에 이르러 농부들의 소리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이사질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인 황윤석(1729~1791)은 『이재난고( 頤 齋亂藁)』에 서 “백제의 「산유화」는 단지 그 소리만 남아있고 가사는 없어졌으니, 이는 반드시 당세에 유행되 었을 뿐 문자에 의탁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는 백제시대의 가사는 소실되고 그 곡에 새로운 가사가 덧입혀 전함을 의미한다. 이후의 기록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 『부여지』 (1929) 등이 있다. 『증보문헌비고』권246 백제 가곡조에는 “남녀가 서로 즐기는 가사로서 음조 (音調)가 처량하고 구슬퍼 「옥수후정화(玉樹後 庭花)」와 짝할 만하다.”라고 「산유화가」를 기술 하고 있다. 비록 가사가 없어 직접적인 맥락을 찾는 것은 어려우나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으며 현재도 부여를 중심으로 「산유화가」가 불린다는 점으로 보아 백제로 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부여지』에서는 「산유화」의 근원과 유래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 중기 충남 부여 인물인 이사명(1647~1689)의 『포암 집(蒲菴集)』을 인용하는데 이는 앞서 기술한 『흡 재집』보다 반세기 이상 빠른 것으로 당대 부여 일대에 「산유화」가 민요로 널리 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부여에서 「산유화가」는 조선후기 이래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왔 다. 애잔한 곡조를 바탕으로 노동 현장에서 불 려왔으나 농사현장의 산유화가 전승은 모심기 방법의 변화의 큰 영향을 받아 원래 줄모를 심 기 전에 전승되던 노래였으나 줄모를 심으면서 부터 모심기에서의 산유화가 전승은 중단되었 고 놀이와 여가, 이따금 심심할 때 방안에서 부 르는 것이 전승되었다. 무형유산으로는 1972년 부여군 세도면 장산리에서 발굴되어 1975년 10 월 16일 대전 신도극장에서 제21회 백제문화제 에서 최초로 공연되었다. 다음해 10월 진주에서 열린 제1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이후 1982년 12월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현재 에 이르고 있다. 충청남도 무형유산 「산유화가」 는 홍준기(1899~1991), 박홍남(1920~2006), 이병호(1926~1995)를 시작으로, 조택구 (1937~2016), 김영구(1946~)를 거쳐 송관섭 (1959~)에 이르고 있다.
「산유화가」는 농사현장에서 다양한 가사를 얹 어 부르는 형태로 전승이 되었다가 무형유산 지 정과 맞물려 모심기에서 벼를 수확하고 타작하 는 과정의 작업을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곧 벼 농사의 각 과정의 순차에 따라서 노래가 구성 되고 이것이 대표성을 갖는 「산유화가」로 고정 되어 현재 여섯 가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먼 저 논에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모심는소리」와 김을 매면서 부르는 「논매는소리(혹은 김매는소 리)」, 벼를 타작하면서 부르는 「벼터는소리」, 타 작한 벼에 키질을 하면서 검불을 날려버릴 때 부르는 「검불날리는소리」, 그리고 볏단을 쌓으 면서 부르는 「볏단쌓는소리(혹은 노적노래)」가 그것이다. 「모심는소리」와 「논매는소리」는 다른 지역의 논농사소리와 마찬가지로 느리게 부르 는 긴소리와 빠르게 부르는 자진소리가 짝을 이 루고 있고, 이 중 「모심는소리」는 「산유화」라 부 르기도 하는데 이는 메김 소리의 첫머리에 “산 유화야~”라는 가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벼터는소리」는 「벼바심소리」, 「검불날리는소리」 는 「나비질소리」나 「솔비소리」로, 「볏단쌓는소리」 는 「노적소리」, 「받어라소리」, 「노적가리쌓는소 리」 등으로 불린다. 충청남도 무형유산 「산유화 가」에는 마지막에 노래의 끝을 알리는 「마감소 리」가 붙어있어, 총 6종 8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원과 유래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 중기 충남 부여 인물인 이사명(1647~1689)의 『포암 집(蒲菴集)』을 인용하는데 이는 앞서 기술한 『흡 재집』보다 반세기 이상 빠른 것으로 당대 부여 일대에 「산유화」가 민요로 널리 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부여에서 「산유화가」는 조선후기 이래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왔 다. 애잔한 곡조를 바탕으로 노동 현장에서 불 려왔으나 농사현장의 산유화가 전승은 모심기 방법의 변화의 큰 영향을 받아 원래 줄모를 심 기 전에 전승되던 노래였으나 줄모를 심으면서 부터 모심기에서의 산유화가 전승은 중단되었 고 놀이와 여가, 이따금 심심할 때 방안에서 부 르는 것이 전승되었다. 무형유산으로는 1972년 부여군 세도면 장산리에서 발굴되어 1975년 10 월 16일 대전 신도극장에서 제21회 백제문화제 에서 최초로 공연되었다. 다음해 10월 진주에서 열린 제1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이후 1982년 12월
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현재 에 이르고 있다. 충청남도 무형유산 「산유화가」 는 홍준기(1899~1991), 박홍남(1920~2006), 이병호(1926~1995)를 시작으로, 조택구 (1937~2016), 김영구(1946~)를 거쳐 송관섭 (1959~)에 이르고 있다.
「산유화가」는 농사현장에서 다양한 가사를 얹 어 부르는 형태로 전승이 되었다가 무형유산 지 정과 맞물려 모심기에서 벼를 수확하고 타작하 는 과정의 작업을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곧 벼 농사의 각 과정의 순차에 따라서 노래가 구성 되고 이것이 대표성을 갖는 「산유화가」로 고정 되어 현재 여섯 가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먼 저 논에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모심는소리」와 김을 매면서 부르는 「논매는소리(혹은 김매는소 리)」, 벼를 타작하면서 부르는 「벼터는소리」, 타 작한 벼에 키질을 하면서 검불을 날려버릴 때 부르는 「검불날리는소리」, 그리고 볏단을 쌓으 면서 부르는 「볏단쌓는소리(혹은 노적노래)」가 그것이다. 「모심는소리」와 「논매는소리」는 다른
현재 충청남도 무형유산 「산유화가」는 ‘산유 화가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을 이어가고 있다. 보존회는 회장을 비롯한 80여명의 회원으로 구 성되어 있으며 보유자와 보존회 회원은 백제문 화제를 포함하여 매년 한차례 이상의 정기공연 을 실시하며 이 공연을 통해 군민과 관광객들 에게 「산유화가」의 음악적 우수성을 시연해오고 있다.
전수받은 사람과 환경이 조성되지 않기에 급 격하게 사라져가는 지역의 논농사소리를 “문화 유산”이라는 틀에 넣어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 왔으며, 많은 시도 무형유산과 국가무형유 산으로 지정하여 보존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처럼 「산유화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 고 발전하였지만 여전히 본질적인 가치와 아름 다움은 변하지 않았고 우리가 소중히 보존해야 할 중요한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