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문화원
글_홍승균
아산의 국보
이순신 장검
문화유산은 그 시대의 공력이 모아진 명품이 기도 하고 쌓이고 덧붙여진 시간의 흔적이 내재 할 때 가치를 더한다. 오랜 시간의 무게감이 느 껴질 때 그를 대하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 는 것이다.
아산시의 현충사에 소재한 충무공 이순신 장 검이 대한민국 국보로 승격되었다.
이순신 장검 두 자루는 그동안 ‘이순신 유물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이미 국가보물에 지정되 어 있었는데, 긴 시간 동안의 심사를 거쳐서 이 순신의 장검 두 자루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순신 장군의 유허인 현충사에서는 이를 기념하 고 국보에 걸맞은 전시환경과 홍보차원으로 대 대적인 리모델링을 진행하고 올해 충무공 탄신 기념일이자 아산시의 대표적인 축제인 성웅 이 순신 축제에 즈음하여 재 개관하였다.
기존의 보물이었던 ‘도배’는 ‘복숭아모양 잔과 받침’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였으며, 충무공의 덕수 이씨 종가로부터 전해져 새롭게 세상에 드 러난 요대의 ‘함’과 더불어 요대, 옥로를 분류하 여 일괄 보물지정으로 재편하게 되었다.
국보 승격에 대한 심의 과정에서는 이 칼을 ‘이순신 장도’라고 명명하였다. 주지하다시피 ‘도’는 외날의 형태이며, ‘검’은 양날의 칼을 의 미하기 때문에 분명히 이순신의 칼은 ‘도’에 해 당한다. 그러나 “검”이라는 단어가 주는 품격을 감안하고, 지난 시간 동안 장검으로 불렸다는 점이 논의되어 최종 ‘이순신 장검’으로 확정 지 었다.
이로써 아산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국보이 자,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충무공의 ‘난중일기’와 아산 풍산 홍씨 종가의 ‘기사계첩 및 함’에 이어 이순신의 장검이 지정 됨에 따라 총 3건의 국보를 보유한 역사문화도 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선정되어 전승하는 수천 점의 보물들은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보(至 寶)로서 무한한 가치가 있음은 새삼 논할 필요 가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국보라는 개념은 그 야말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최상의 문화유산 이라는 점에서 장검의 승격에 대한 결과는 아산 시의 큰 경사라 하겠다.
기실 충무공 이순신의 장검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보로의 승격이 쟁점화되었던 사 안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억지 주장하였던 바, 장검은 외형상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 정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고, 한편으로 는 국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선정함에 인명 을 살상하는 무기를 대표격으로 지정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의견도 불편한 인식요소가 되 었다.
하지만 상호 문화적 시대상 교류와 기술적인 인용이 자연스러웠던 당시의 역사현상, 조선의 공예적 기법이 물씬 반영되어 제작된 조선적인 명검은 조상의 슬기로운 기능이 인정되어 바야 흐로 세상에 다시금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순 신의 장검은 칼로써의 탁월한 강도와 예리함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칼날에 새겨진 명문과 선 각 장식의 기술성, 칼집 제작의 조선 전통방식 등 세련되고 조화로운 조형성이 우수하며 전체 적인 완성도가 탁월하다. 장검은 결국 장검을 만드는데 앞섰던 일본의 제작기법에 더하여 조선환도의 외장적 특징이 결합하고 보존상태도 우량한 최상의 명품으로 손색이 없다.
더욱이 현충사의 장검은 온 국민으로부터 가 장 존경받는 충무공 이순의 칼이라는 점을 반영 하지 않더라도, 유려한 외형이나 장검이 주는 품격과 검광에서 오는 기세는 국내 그 어떤 전 통검보다도 가장 뛰어난 으뜸의 명검으로 평가 된다.
두 자루는 각기 197.2 ㎝ 와 196.8 ㎝의 길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전용이 아니라 의전용 이다. 당시 검을 주요 전장의 전투무기로 활용 하였던 일본의 경우에도 실전용 칼이 140 ㎝를 넘지 않았듯이 이순신의 장검은 실제 사용한 것 이 아니었으며, 동 시기에 굳이 두 자루를 제작 한 뜻은 남다르다.
두 자루라는 장검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건곤, 음양, 태극, 자웅을 의미하며, 두 자루가 완벽 한 조화를 이루는 전형적인 길상(吉祥)의 표상 으로 제작되었다.
임진왜란 개전 후 2년여 만에 완성되었던 만 큼 당시 충무공 이순신장군에 대한 조선백성의기대와 존경심이 숭고하게 스며있으며 그 명성 과 성원에 걸맞도록 미려함을 갖춘 최상의 걸작 이다.
장검은 조선의 모든 첨단 공예기법을 총동원 한 기술의 완성체이다. 무엇보다도 제작자가 태 귀련(太貴連) 이무생(李茂生)이라는 실존인물이 확인될뿐더러, 제작의 시기와 장검의 주인이 누 구인지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 그리고 충무공의 싯귀가 새겨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극대화된다.
칼을 숭상하던 사무라 이 문화의 일본에는 현재도 수십만 자루의 칼이 전해오는 반면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350여 자 루의 전통검이 전래되고 있다. 그런데 제작한 연 대가 분명하고, 제작자와 검의 소유자가 확실한 검은 이순신의 장검이 유일무이하다는 점이 국 보선정의 주된 이유로 참작되었다.
특히 장검의 국보승격은 임진 7년 전쟁의 사실상 종지부였던 노량해전의 즈음에 명나라 장군으로부터 존경 의 뜻으로 선사받은 술잔과 요대 및 옥로 즉 ‘메이드 인 차이나’와 달리 우리 선조들의 땀과 정 성이 깃든 조선의 장검에 대해서 일괄 보물로부 터 차별화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는 새롭게 와닿는다.
또한 장검이 별도의 국보에 지정되었다는 것 은, 아산시의 입장에서는 보유한 국보와 보물 등 국가 주요 문화유산의 수치적 증가효과를 가져 왔다는 점에서 더욱 긍정적이다.
현충사의 사당에 전시된 역사화 십경도(十景 圖)에는 이순신의 생애를 열폭의 그림으로 표현 하여 공의 숭고한 업적을 표현하고 있다. 충무공 이 수군의 지휘관이 되기 이전의 초임시절, 함경 도 녹둔도 만호의 직책으로 북방의 여진족을 섬 멸하였던 그림이 있는데, 그 속에는 칼을 휘두르 며 호기로운 기세로 적장을 쓰러뜨리고 있다. 이 순신이 일당백의 무장이었음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만날 수 있다.
효행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이 순신, 서정적인 시를 짓는 소양과 고매한 인격자로서의 단아한 이순신, 지략이 출중하고 공 무에 탁월한 이순신의 엄정한 이미지뿐만 아니 라, 수많은 왜적을 섬멸하여 수장시킨 용맹한 무장 이순신을 대변할 수 있는 상징성이 바로 장검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제도권 교육을 통해서 이순신의 위대 함을 학습하였고, 미디어 매체와 서적으로 이 순신을 접하고 존경하는 성장과정을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이순신은 ‘성웅’으로 추앙되었으 며, 완전무결하고 조금의 어긋남이 없는 인물 로 거의 신격화된 위상으로 예우하였다.
조선의 온 강토가 전쟁의 참화로 신음할 지경 에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만큼은 일반 백성들 까지도 어버이처럼 장군을 의지하여 누란의 위 협에서 극복하고 생존할 수 있었다. 장군의 섬 세함과 자애로운 지도자적 면모가 이를 가능하 게 하였겠지만, 풍랑이 요동치는 바다 한복판 의 해전에서 장군의 한마디 호령으로 전 함대 가 일사분란하게 왜군과의 일전을 벌릴 수 있었 던 동력은 어진 성품으로 군사들을 감화시키는 것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장수로서의 서슬 퍼런 위엄이 오금을 저리게 하고 그 기운 에 대한 병사들의 절대적인 신뢰가 수반되어 있 어야 발휘할 수 있는 현장이다.
그 모습을 오늘의 우리는 아산 현충사의 이순 신 장검에서 만나고 체감할 수 있다.
아산의 현충사에는 이미 국보로 선정된 난중 일기와 장검 그리고 전술한 보물에 이어 ‘선무 공신 1등 교서’도 보물로 기 선정되어 있다. 충 무공이 우리 민족사에 끼친 족적만큼이나 공의 자취는 우리 모두에게 민족적 자존을 부여하기 에 모자람이 없다.
또한 이 유물들은 충무공의 실제고향인 서울 이나 임진왜란시에 활약을 펼쳤던 남녘의 여수 와 통영 그리고 남해보다 이순신의 본령은 결국 우리 아산임을 만방에 뽐낼 수 있는 든든한 자 랑거리라서 이번의 국보승격은 아산시와 우리 충남의 뜻깊은 의미라고 여겨진다.
비단 아산시민의 자랑거리를 넘어 온 국민이 누란을 극복한 충무공의 후예답게 기개와 포부 를 다잡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바로 아산 의 현충사에서 만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이 순신 장검이다.
장검에는 다음과 같은 이순신 장군의 일필휘 지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