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화가

창원 이영복 화백

홍북중계리 왕솔밭에서 자란 소년

소나무 그림으로 우뚝서다

창원)이영복 화백은 ‘소나무 화가’로 유명하다. 그가 홍성 출신 화가라는 것도 널 리 알려진 사실이다. 홍성중학교 3학년, 열여섯의 나이에 당당히 국전에 입상하여 대한 민국 화단을 깜짝 놀라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고암 이응노 화백과 같은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고, 선친께서 고암과는 막역한 벗으로 교분이 두터웠다 는 인연 또한 예사롭지 않다. 일가친척이 아직도 중계리에 세거하고, 부모님을 모신 선영 이 있어 지금도 이화백은 종종 고향을 찾는다.

추수가 끝나고 나면 문중마다 길일을 택해 조상의 묘소에서 시향제를 올린다. 이영복 화백도 시향을 앞두고 고향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청했다. 수화기 너머 느 리고 차분한 어투의 이화백은 연신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는 “과연 내가 그럴만한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만남을 허락했다. 시향제 하루 전인 11월 19일 아침 기차로 내려와 부모님 산소에 성묘 먼저 하고 선영을 둘러본 후 문중 사람들 을 만나 시향제를 의논하고 나면 저녁 때 잠깐 짬이 날 것 같다는 것이다. 만남은 오후 5 시가 좀 넘은 시각에서야 겨우 이루어졌다. 늦가을 해는 일찍 저물어 어둑어둑하고 기온 마저 싸늘했다.

홍성중 3학년 때 산수화 <홍성교외>로 제4회 국전 입상

짙은 남색 외투를 단정하게 여미고 나타난 이 화백은 미수의 나이에도 얼굴에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안색이 맑았다. 인터뷰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만남 직전까지 고사하던 노 화백은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 울 적해 보였다. 산소에 다녀온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중계리 홍천감리교회 건너편에 살았어요. 오늘도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아! 저 집이 내가 살던덴데!’ 하고 옛 생각이 많이 났지요. 그때는 뒷동산이 전부 왕솔밭이었어요. 아름드리되는 소나무가 참 좋았지요. 아마 어 릴 때부터 소나무를 보며 자라다 보니 천상 소나무를 좋아하는 감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소나무는 이 화백의 예술과 삶을 개괄하여 설명할 수 있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의 소나무에 대한 애정 은 각별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는 이미 산수화작가로 인정받던 19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50년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소나무에 매료되어 전국 방방곡곡 이름난 소나무를 일일이 답사하며 소나무의 본질을 탐 구해왔다. 중학 시절 당대 최고 권위의 국전에 입선하여 일약 주목받는 신예로 화제를 모으며 화단에 입문하 였고, 산수화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지만 작가로서 그의 작업은 소나무가 본령을 이룬다. “소나무는 좋다 해서 그려가지고는 안 되요. 산수화도 물론 그렇지만 영혼이 있어야되요. 소나무답게 그리 는 것이 소나무 잘 그리는 것이 아니고 2~300년, 몇 백년 된 소나무는 영적으로 얘기가 될 정도로 교감을 이 루게 되요. 느티나무나 은행나무는 그런 걸 못느껴요. 그런데 소나무는 영적인 교감이 되요. 그 의젓함, 소박 하지만 고고함 그런 것들을 포함하고 있어요. 소나무 그림은 그림으로만 봐서는 안 되는 그 이상의 것이 있어 야합니다. 그래서 소나무 그림은 산수화보다 더 어려워요.”

이 화백은 너무 일찍 찾아온 조숙과 성공으로 한 때 천재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타고난 재주보다는 어릴때부터 자연과 깊이 교감하는 감성과 사물의 본질에 닿으려는 정신세계에 대한 끈질긴 추구가 자신을 예술가의 길로 이끈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홍성중학교 3학년 때인 1955년 제4회 국전에서 <홍성교외>라는 제목의 산수 화로 입선했다. 국전의 역사를 통털어 최연소 입상자이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중학생이 국전에 출품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인데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이화백은 홍성초등학교를 다닐 때 집이 멀어 통학하기가 어려웠다. 선친께서는 당시 홍성초등학교 앞에 살 았던 장동화선생님 댁에 하숙을 마련해 주었다. 그림에 조예가 있던 장동화선생님이 이 화백의 재능을 알아 보고 “너는 그림을 그려야 된다”고 늘 말씀하시고 격려해 주신 것이 동기가 됐다.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하 게 된 것은 홍성중학교에 입학하고서다. 6.25전쟁이 나자 근대 동양화단의 대부 격인 이당 김은호 선생의 수 제자였던 심원 조중현 선생이 홍성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마침 홍성중학교에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 화백은 입학하자마자 심원의 눈에 띄어 그 밑에서 동양화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 화백은 미술부장을 맡아 심원 선생 과 함께 학교 사택에 기거하다시피 하며 3년 동안 사사 받았다. 국전 입상작 <홍성교외>는 이때 탄생했다. 백 월산을 배경으로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풍경을 산수화로 그린 이 작품을 당시 홍성중 교장선생님이 보시고 너무 아깝다며 출품을 적극 추진했다고 한다. 작품이 크니까 들고 옮기기도 어려웠는데 교장선생님이 학교 교직원을 시켜서 홍성역까지 들고나와 기차에 실어줘서 당시 청와대 앞에 경북궁에서 접수를 했는데 도착해 보니까 접수 마감 시간이 지나 있었다고 한다. 접수를 보던 여자분이 마감 시간이 지났다며 접수가 안 된다고 했다가 옆에 계신 나이 좀 들어 보이는 위원장인가 하는분이 ‘그럼 그림이나 봅시다’ 해서 보여줬더니 돌려보 내기는 아깝다면서 접수를 해줬다.

“운이 좋았어요. 이분들이 마감 시간이 되서 막 퇴근하려고 하는 시간에 도착한 거예요. 조금만 늦었어도 접수를 하지도 못했겠지요. 조중현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난 것도 그렇고요. 선생님이 계시는 사택에는 붓도 있 고 채색 물감도 있고 그림 재료들이 다 있었어요. ‘너 여기서 자라’ 하시면서 제 그림을 보고는 ‘너 가을인데 왜 언덕에 억새풀이 없느냐? 억새풀을 많이 그려 넣어라 해서 억새풀 그리고…그렇게 완성된 것이 입상작 < 홍성교외>였어요.”

학교에서 공부도 곧잘 하던 터라 아버님께서는 법관이 되면 어떨까 하시기도 했는데 워낙 일찍 국전에 당 선되다 보니까 그냥 미술 쪽으로 후원을 해주셨다고 한다. 국전 입상 후 서울대학에서도 입학 제의를 받았지 만 당시 서울대보다 홍익대학에 최고의 대가들이 포진해 있어서 홍익대학교 동양화학과에 입학했다고 한다. “선친께서는 어떤 분이셨나요?”

“그렇잖아도 오늘 산에 가서, 마침 둘째 형님도 아파서 못 올라가시겠다고 하셔서 혼자 올라가서 많이 울었 습니다. 아버지 어머니하고 합장하고 계신데 ‘불효자가 왔습니다’하고…(울먹울먹 목소리를 떤다) 다른 길로 갔더라면 부모에게 효도했을 텐데… 예술 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해서…”

처음 만날 때 유난히 울적해 보였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선영(先)의 덕, 고향의 품은 이런 것일까? 마음의 빗장을 풀고 실컷 울어도 되는.

불과 16세의 나이에 천재소년 화가로 혜성같이 떠오르게 된 그 벅찬 성취와 영예는 어쩌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자칫 자만에 빠질 수도 있고, 억압의 굴레였을 수도 있는 그 명예로운 위 기를 그는 어떻게 넘었을까? 동산의 잘생긴 소나무 하나를 가슴에 품고 고향을 떠났던 천재 소년은 어느새 구 십을 바라보는 원로가 되었다. 영욕의 세월을 돌아보면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방방곡곡 빼어난 소나무 답사, <단호사 적룡송 서설(瑞雪>걸작 중의 걸작

창원 이영복의 소나무 사생은 역사가 오래 되었다. 이천의 반룡송蟠龍松), 청령포의 관음송, 예천의 석송령(松), 단호사의 적룡송(龍松), 선암사의 침굉송(松) 등 전국 방방곡곡 오래되고 신묘한 소나 무를 찾아 직접 답사하면서 이른 새벽부터 시시각각 달라지는 소나무의 모습을 관찰하고 반드시 현장에서 사생한다. 창원의 소나무 그림 앞에 서면 마치 살아있는 소나무를 보는 것 같은 현장감과 소나무 특유의 기운생동(氣運生動)이 실감 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철저한 사생을 바탕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화백은 소나무 답사를 나가면 꼭 그 근처에 민박을 얻어 며칠씩 묵는다고 한다. 이른 아침에도 올라가 보고, 한 낮에도, 저녁에도 올라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소나무의 모습을 여러 날 관찰하기 위해서다. 이화백에 따르면 용트림하듯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소나무 둥치의 청정하고 생동하는 기 운이 가장 잘 느껴지는 때는 이른 아 침이라고 한다. 새벽 안개가 살짝 서 려 있고, 수분이 촉촉이 젖어있는 때 가 가장 좋다. 이화백은 좋은 소나무 그림 역시 메마르지 않고 수분이 촉촉 하게 느껴지도록 표현하는 것이 백미 라고 귀뜸한다. 이렇게 소나무 답사에 매진한 세월이 50년 가까이 된다. 전국 각지의 빼어난 소나무를 찾아 나서는 이화백만의 답사는 사생의 대상이 되는 사물을 찾아 발품을 파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이나 오랜 벗을 찾아 나서는 순례와 같은 여정이었다. 실제 그는 소나무 의 뻗고 휘어짐을 통하여 필법의 묘를 취한 바 있고, 오래 묵은 소나무를 찾아 안부를 묻는다고 말한 바 있 다. 이러한 대상과의 교감은 바로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고전적 덕목의 구체적 실천인 동시에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관류하고 있는 핵심적 가치라 할 것이다.

이영복 화백의 대표작 <단호사 적룡송 서설(瑞)>은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힌다.

“오백호가 넘을 듯한 큰 화폭을 그득히 채운 적룡송 서설이야 말로 실물대로 다가왔다. 이미 그 실물을 나는 여러 번 보았을 터인데 눈 덮인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선지 그만큼 우람하고 대단히 신선했다. 자세히 살피니 그 백설 표현은 화선지에다 백색 물감을 칠한 게 아니라 화선지 본래의 바탕색 그대로를 살린 것이 었다. 낏낏이 일어선 진초록 솔잎들이 그 안에 서설을 고이 품고 있어서 한결 생동하는 기운을 뿜고 있다. 살아있는 용인 세차게 꿈틀대는 굵은 줄기의 용비늘에도 아주 살짝 서설이 덮여있다. 이러한 서설의 애 무를 받아 적룡은 더욱 신나는 모양, 땅바닥에도 온통 흰 눈인데 한 쪽 가지 아래 보기 좋게 청태 낀 노석 (石) 하나가 웅크리고 있다.” <박희진/시인 예술원 회원>

“작가의 소나무는 사생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그 표출은 온유하고 담백함이 특징이다. 수묵은 함축과 절제를 통하여 방만함을 경계하고, 채색은 수묵의 기운을 방해하지 않는 치밀하고 섬세한 경영은 그의 작 업에 나타나는 장점이자 특징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은 담백하고 편안하나 짜임새가 완강하고 여 백이 헛되이 흐름이 없다. 치밀한 사생과 치열한 공간경영의 결과는 그의 화면 전반에 걸쳐 엄격히 적용되 는 준칙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세를 과장하여 취하거나, 혹은 객관적인 형태에 지나치 게 집착하여 기운을 잃는 폐단을 경계하며 소나무가 가지고 있는 온전한 기운을 포착하고 표현하고자 의 지의 반영일 것이다. 이는 대상과의 합일을 통해 그 이면을 읽어낸 결과로 외표로 드러나는 생태적 특징은 물론 소나무에 일정한 인성(人性)을 부여하고 대화와 교감을 통해 획득되는 가치인 것이다.” <김상철/동덕 여대 교수 미술평론>

이 화백은 50여년 산수화를 시작으로 화조, 억새풀, 수많은 소나무를 그려왔으나 아직도 소나무 그림은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작업일기에서 “오직 법도를 엄격히 지킨 뒤에라야 초신진변(超神盡하는 것이니 유법(有)의 극이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의 글을 인용하면서 무법 으로 돌아간다는 뜻은 이미 있었던 법들을 부단히 연마하면 새로운 법이 생긴다는 뜻으로 이는 인간만사 에 적용될 철리(라면서 “나는 오늘도 선현들께서 소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한 까닭을 생각하며 붓을 든 다”고 적고 있다.

“서화는 그 사람의 됨됨이 만큼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숙련이 능수능란하여 달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해도 기술자적 붓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격수양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이화백은 힘주어 말한다. 소나무를 그리려는 작가나, 소나무 그림을 감상하려는 사람도 좋은 소나무를 많이 보고 우선 소나무의 깊 은 정취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어느덧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묵은 것을 보내고 새 것을 기다리는 세밑, 우리 함께 이화백이 심안 眼)으로 그려낸 소나무를 감상하며 늙어갈수록 격을 더해간다는 노송의 운치와 의연함을 따라 심의 를 세워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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