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문화원

글_김선임

내포가야산,

내포불교와 보원사지 문화유산 이야기

□ 내포가야산, 내포불교문화

충남의 역사문화는 내륙의 금강문화권과 서 해안의 내포문화권으로 구분된다.
금강문화권은 금강과 계룡산 중심, 구석기문 화, 백제문화, 조선시대 양반문화로 특징된다 면, 내포문화권은 삽교천과 가야산 중심, 문물 유입지, 삼국시대 불교, 고려시대 성리학, 조선 시대 천주교가 전래된 것이 특징이다,

내포라는 용어는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지 만, 조선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10개 고을(태 안, 서산, 해미, 덕산, 예산, 신창, 아산, 홍성, 보령, 결성)이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소개하면 서 널리 유포되었다고 할 수 있다. 험준한 산지 보다 평탄한 구릉성 산지와 내륙 깊숙이 포구가 형성된 지형적 특징으로 삽교천, 무한천, 곡 교천, 광활한 충적평야지대로 농산물과 해산물 등이 풍부하다.

바닷길을 통한 문물유입으로 내포는 불교, 유 교, 천주교가 빨리 전해져서 사상과 종교가 활 성화되었다. 해안 방어가 필요해서 보령 충청 수영, 해미 충청병영, 태안안흥진성이 축조되 었다. 또한 보부상의 활동이 활발한 것도 내포 문화의 특징이다.
이러한 조건에 기인하여 내포불교의 특징을 살펴본다.

첫째 경주는 ‘석굴암과 불국사와 남산’으로 특 징된다면, 서산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과 보원사와 가야산’으로 특징될 수 있다.

둘째 경주남산은 많은 마애불이 남아 있어 가시적인 문화를 느낄 수 있다면, 내포가야산은 폐사가 되었지만 비보사상 등 심미적 가치를 느 낄 수 있는 5km 반경 내 100여 개의 절터가 있 는 유례없는 절골이다.

셋째 경주가 왕실 귀족의 문화로 현존한다면, 서산 마애삼존불과 백제불교는 마애불의 미소 만큼이나 서민적인 문화로 나타난다. 그리고 백제문화권 내에서 부여공주가 왕실 귀족문화 라면, 내포가야산권은 서민문화로 자리매김 된다.

이러한 불교문화 가치에 대해 석굴암 본존불 미소와 문화적 가치는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세 계적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서산마애삼존불의 미소와 문화적 가치는 아직 미지의 세계로 남겨 져 있다.

□ 보원사지 역사문화내용과 가치

(1) 보원사지 현황

■ 1987. 7.18.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었다. 총면적 102.474㎡(48필지)

■ 경관은 금당지 중심으로 동서방향이 길고 남북방향이 짧은 대지형상이며, 하천을 기점으 로 하천 아래는 진입영역으로 당간지주, 석조 가 위치하고 있고, 하천 위쪽은 중심영역으로 5 층석탑과 금당지가 위치하며, 금당지 언덕 위 는 석축이 설치되어 있고, 석축 위에 법인국사 탑과 탑비가 위치하고 있다.

(2) 보원사지와 화엄종

보원사지는 마애여래삼존불로부터 남쪽으로 약 1km에 위치한 절터이다,

보원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백제 시대 550년경 제작된 금동여래입 상이 이곳에서 출토되었고, 인근에 백제 시대 에 조성된 ‘마애삼존불’이 있으며, 보원사가 통 일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였던 것 1) 으 로 보아 보원사는 최소한 백제 시대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보원사가 최초로 기 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신라 헌강왕 6년(880)이 다.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명에 의하면, ‘선 사는 웅진 사람으로서 흥덕왕 2년(827)에 가량 협산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한다. 이 를 미루어 보원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원사는 신라 하대와 고려초 크게 번성해 화 엄종의 중심 사찰로서 위상이 높았다. 904년 (신라 효공왕 8) 최치원이 저술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은 보원사를 ‘화엄십찰(十刹)’의 하나로 언급한다. 보원사에는 국가에서 정식 으로 구족계를 행하는 계단(戒壇)도 설치됐다. 무수한 고승대덕이 보원사에서 구족계 2) 를 받 았다. 827년 보조국사 체징(804~880), 874년 진공대사(855~937), 880년경 광자대사 윤다 (864~945), 888년 진철대사 이엄(870~936), 898년 법경대사 현휘(879~941)가 대표적이 다. 보원사는 의상스님 이후 화엄십찰 중 바닷 길을 통해 외부와의 접촉이 가능한 화엄도량이 었다. 이런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2005년부터 보원사지(사적 제316호)는 10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보원사는 백제 시대를 거 쳐 통일신라에서 고려 제4대 광종 때 국사였던 법인국사 탄문스님이 보원사에 주석하면서 보 원사를 크게 중창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사』권제6(1035년)에 보면 “무릇 네 아들을 둔 사람은 한 자식의 출가를 허락하니 영통사, 숭 법사, 보원사, 동화사 등 4개 사원의 계단 3) 에서 소엽의 경률을 시험토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

보원사는 조선중기 이후 어느 시기에 명칭이 강당사로 바뀐다. 1619년(광해군 11) 편찬된 <호산록(湖山錄)>은 “강당사는 두가지 이름이 있는데 하나는 보원사로 이는 옛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강당사로 새로 지은 이름이다”라고 전한 다. 보원사는 조선 후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18세기 무렵 폐사된다. 1757~1765년 각 읍에 서 편찬한 읍지를 모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에는 강당사가 ‘고적(古蹟)’으로 분류돼 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하면 보원사에는 법당, 법 당 앞 2층 고각, 부도, 고비, 나한전, 취개정 등 이 있었으나, 절과 집은 모두 없어지고, 비석과 탑, 철부처님만이 남았는데, 철부처님은 1918 년 조선총독부에서 가져가 현재 국립중앙박물 관에 모셔져 있다.

보원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개심사에서 보관 중이거나 개심사로 부터 환지본처한 경판이 조선 1565년, 1566 년, 1591년에 제작된 점과 『호산록』(1619년) 에 폐허가 되었다고 하지 않은 점과 『동여고비』 (1682)에 보원사가 표시된 점, 『상산삼매』(1753 년)에 거의 폐사된 모습으로 기록된 것으로 1682년에서 1754년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보 인다.

보원사지에는 보물로 인정받은 다섯 점의 석 조물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 정되는 당간지주와 석조,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석탑, 그리 고 고려의 4대 임금인 광종의 스승이었던 법인 국사 탄문스님의 보승탑과 탑비가 있다. 그 외 에도 많은 석부재가 남아 있다. 또한 보원사지 고려철불을 비롯해 다수의 유물들이 국립중앙박물관, 부여박물관, 공주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이다.

현재 보원사지에는 옛 보원사의 혜맥을 이 어 2004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 사 말사로 등록된 보원사가 종교활동을 하고 있 다. 보원사 법당에는 보원사지 출토로 전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진 통일신라시대 철불과 동일한 철불이 모셔져 있고, 1565년에 판각된 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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